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범/선수 시절 (문단 편집) ===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50223010023048001501912.jpg]] 일본에서의 데뷔 후 첫 달은 맹활약을 펼치면서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다. 당시 일본 야구관에 있어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핵으로 타격은 약해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3할을 넘나드는 타격과 부상 전 기준 팀내 홈런 3위안에 드는 생각 외로 뛰어난 장타력, 거기에 특유의 빠른 발로 도루 리그1위를 기록하면서 주니치 팬들 뿐 아니라 일본야구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수비쪽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유격수는 뛰어난 수비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 외로 비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첫째 이유는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가 이미 탈세로 시즌 아웃이라 대체 유격수가 없었고 둘째는 시즌 초에 보여준 좋지 못한 수비력이 본실력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즌 초의 타격성적이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는 리그가 바뀌었음에도 공격력이 나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면서 수비쪽도 본실력이 나올것이라 생각하며 그의 활약을 지속적으로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부상 전 올스타전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 유격수와 2배이상 차이나는 득표까지 받았을 정도. 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기 시작했을 뿐더러[* 4월 0.337 2홈런 14타점 10도루 / 5월 0.260 5홈런 10타점 5도루 / 6월 0.235 2홈런 4타점 2도루.] 상당수의 견제성 사구로 인해 성적도 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4월 11일 요코하마의 경기에서는 빈볼을 2회, 이어 16일에는 삼성에서 뛰었던 [[갈베스]]에 의해 헤드샷까지 당하기도 했다. 가와지리에 의한 사구 시점에서 이종범의 사구는 리그 1위였다.] 6월 초 들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이종범은 6월 중순에 타격감을 조금씩 회복해가며 부상 직전인 22일까지 홈런을 포함한 7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감을 다시 찾아가나 싶더니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의 몸쪽 공을 무리하게 스윙하려다 공이 오른쪽 팔꿈치에 맞으면서 골절상을 입게 되고 남은 시즌을 거의 날리고 시즌 막바지에야 가까스로 복귀하게 된다. 안타깝게 그 부상 이후로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98년 시즌 최종성적은 67게임에 출전해 .283의 타율과 10홈런 18도루 OPS .873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성적으로 보이나 당시 주니치에서는 상당한 공격지표를 기록했다. 팀의 주전 중에 타율이 이종범보다 나은 선수는 .285를 기록한 세키가와밖에 없었으며, 홈런 수 역시 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야마자키 27개, 고메즈 26개에 이은 3위를 기록. 도루는 시즌 2위를 기록했으며 WAR 역시 60게임 남짓한 기간 동안 2.9를 기록했던만큼,[* 일본시절 통산 WAR의 경우 00년까지 3년간 5.5로, 의외로 처절하게 망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식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데 이는 98년의 활약에 기인한다. [[https://m.blog.naver.com/ever_17/220408687243|출처]]] 60게임동안 기록한 성적이라는 점에서 용병임을 감안해도 그렇게까지 책잡힐 성적은 아니었다. 이러한 타격 성적 때문에 이후 99년에도 호시노가 외야수로까지 컨버전시키면서, 2할3푼대의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서도 400타석 넘게 출전시킬 정도로 이종범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 98년 팔꿈치 골절 후 시즌 막판에 컴백하면서부터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 99년에는 시범경기에서만 4개의 데드볼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정규시즌에 들어서는 .238의 타율과 9홈런 24도루라는 기록을 거두며 리그 2위를 기록한 도루부분을 제외하면 이종범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처참한 타격성적을 기록했다. 에러까지 7개를 기록하면서 외야수비 또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당시 이로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탈모까지 생기게 되었다.[[https://youtu.be/y3wXAow8axM|#]]]이 당시 주니치가 리그 우승을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고 묻어갔다.[* 나가질 못해서 그렇지(...) 출루시에는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슬라이딩과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로 상대를 뒤흔드는 모습이 종종 나오긴 했다. 이 덕분에 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하이라이트에 성적에 비해선 제법 등장하기도 하고, 나름의 팬층도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도루 성공마다 헬멧에 붙이던 하얀 닌자스티커가 나름의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이종범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비교적 강한 모습을 종종 보여, 안티[[요미우리 자이언츠|교진]]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주니치팬덤에서 어디까지나 처참한 성적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또한 99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조성민]], [[선동열]]과 함께 일본 올스타 대표로 출전, 총 5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며, 1회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 2000년에는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 2군에서 [[본즈 놀이]]를 했었다. 새 용병 데이비드 닐슨(등록명 딩고)이 시즌 초반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하자 바로 1군에 콜업되어 잠깐이긴 했지만 98년 전반기같은 맹활약으로 팀의 10연승에 기여했다. 호시노감독도 이 때 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했을 정도. 연승이 끝난 이후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으나 8월 중순까지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분전하였고, 외야수비 역시 시즌 동안 실책 3개로 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타율은 막판에 힘이 빠진 탓에 .275로 마무리했지만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율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올라간 것으로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2000년 이종범의 성적은 타율만 보면 전년도에 비해 괜찮아 진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실책은 적었지만 수비지표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데다가 장기인 주루플레이에서도 상당 수의 도루사를 기록했고, 출루율이나 장타율도 나쁜 편이었다. 1년에 10개 안팎정도의 홈런을 치는 대신 주루 능력이 퇴화된 이대형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하다.] 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던 이종범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분노 폭발. 급기야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했고[[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38&article_id=0000064588|#]]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라는 처참한 부진을 보이며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해 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었다.[* 투수쪽은 지난시즌 다승왕과 구원왕인 번치와 게일러드가 붙박이였고, 고메스의 가세로 남은 2개의 용병 엔트리를 놓고 용병 넷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다. 여담으로 [[SK 와이번스]]의 일본인 투수 [[가도쿠라 겐]]과는 주니치 시절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카도쿠라가 원정 경기가 끝난 뒤에 이종범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진출 후 20여년이 지난 후 새삼 주니치 팬덤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과 [[2019 WBSC 프리미어 12]]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린 [[이정후]]가 이종범의 아들인데다, 2018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주니치의 역대급 마무리였던 [[선동열]]과 함께 코칭스태프로 다시 한번 페어를 이루었고, 19년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0년 주니치에서 이종범과 한솥밥을 먹었던 데이비드 닐슨이었기 때문. 거기에 2019년 11월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 되면서 올드팬들에게 계속해서 언급되기도 했다. 이종범이 주니치에서 뛰던 당시 리그 우승도 한데다 데뷔 초 나름의 임팩트도 있었고 20년이 지난 덕인지 올드 주니치팬들에겐 고메즈, 선동열, 이상훈과 함께[* 대체로 코리안 삼총사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편이다.] 90년대의 추억의 용병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08071|#1]][[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24356|#2]][[https://gall.dcinside.com/tigers_new/5533633|#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